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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

법정스님의 '좋은 말씀'

by 브레인김주임 2023.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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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나라의 큰 어른으로 불리우는 법정스님에 대해 알아보고, 스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인생의 참 교훈, 고귀한 좋은 말씀들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법정스님(1932년 ~ 2010년)

 

대한민국 불교의 대승이자 큰 어른으로 불리우는 법정스님은 우리에게는 '무소유'로 널리 알려진 스님이십니다. 또한 수십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불교철학을 널리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하신 분입니다. 

 

 

스님은 1932년 11월 5일 전남 해남군 문내면에서 태어나 우수영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당시 6년제인 목포상업중학교를 마치고, 전남대 상대에 입학하게 됩니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혼탁한 인간의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대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1954년 출가를 결정합니다. 출가를 결정하고 오대산으로 떠나던 중 서울 안국동에 계시던 효봉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곧장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행자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후 지리산 쌍계사에서 불도를 정진하셨으며, 양산 통도사를 거쳐 해인사에서 대교과를 마치시게 됩니다.

 

공적과 입적

 

1997년 12월 14일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 개원법회에 한국 천주교 성직자이신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자, 이에 대한 답례로 1998년 2월 24일 서울 명동 성당을 방문하여 특별 강연을 직접 하는 등 종교 간 화합을 위해서도 힘쓰신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스님은 2010년 3월 11일에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지병인 폐암으로 인해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시게 됩니다. 법정은 '내가 죽은 후에 책을 출간하지 말아라'는 유언을 남기셨는데, 스님의 유언으로 그의 수많은 저서들은 절판, 품절되게 됩니다. 이후 출판사들 또한 스님의 유언을 존중하여 모든 책을 절판하기로 합의하였으나, 품귀현상으로 스님 책들의 가격이 10만원 이상으로 치솟는 혼란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법정의 저서에 대한 저작권을 양도받은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는 2010년 말까지만 그의 저서를 판매하기로 결정하고 2010년 12월 31일에는 남은 책들을 모두 수거하여 절판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출판가의 혼란은 다소 진정되는 국면을 맞았지만, 여전히 스님의 책들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무소유의 가르침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 바로 '무소유'라고 스님은 말씀하십니다. 침묵과 무소유로 대변되는 스님의 고귀한 말씀을 통해 바쁜 일상, 스스로 힐링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법정스님의 「좋은 말씀」 중에서

이 세상에는 불행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들의 불행은 물질이나 신체적인 부자유로 인해서라기보다는 가슴에 따뜻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불행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 따뜻한 가슴이 본래부터 갖추어져 있습니다. 부처님, 예수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다 똑같은 마음이지만 중생들의 마음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이웃들에게는 물론 내 집에서 기르는 가축에게, 나무며 꽃들, 혹은 강물, 구름, 산들바람, 저녁노을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게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 놓는 것입니다. 마음이 열려 있지 않으면 내가 편할 수 없습니다. 그 불편함은 그대로 가족에게, 친지에게, 이웃에게 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은혜를 입습니다. 가깝게는 부모 형제부터 멀게는 많은 이웃들, 공기, 물과 흙과 바람, 자연으로부터 무한한 은혜를 입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은혜는 우리의 삶을 이어 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은혜들을 무상으로, 무한하게 받기만 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럽히고 짓밟고 군림하면서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소중하게 받아 써야 할 그 은혜들을 오히려 배반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입은 은혜는 반드시 되돌려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손들이 다시 그 은혜를 입으며 삶을 이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대대로 자기들이 입은 은혜들을 되돌렸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현상입니다. 내가 받을 공덕이 혹시 있다면 그것을 모두 이웃에게 되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의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마다 나름의 특성과 개성을 지니고 있기에 자기만의 특색을 지닌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얼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자기의 특색을 실현하고 일깨우며 자기만의 특성을 내보이라고 이 지구상에 불려 나온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는 자기 분수와 자기 틀, 자기 자리에 맞게끔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남의 자리를 탐내거나 남의 모습을 띠려 한다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죽도 밥도 아닌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저마다 특색을 지닌 얼굴이 있기에 남의 얼굴을 닮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자기의 얼굴을 지닐 수 있어야 됩니다. 자기 얼굴을 지니려면 자기답게 살 수 있어야 됩니다. 자기답게 살아야 자기 얼굴이 만들어집니다. 사람의 얼굴은 자비와 사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많은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 그것은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아름다운 얼굴은 굳어 있지 않습니다. 항상 미소를 머금고 온화함을 지니고 있어요. 닫혀 있는 얼굴이 아니라 활짝 열린 얼굴입니다. 아름다운 얼굴이란 탐욕에 들뜬 얼굴이 아니라 너그럽고 덕스러운 얼굴입니다. 사람은 덕스러워야 돼요. 너그럽고 덕스러운 얼굴이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지혜로 빛나는 얼굴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 얼굴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해야 할 말은 나 자신에게도 덕이 되고, 또 듣는 상대방에게도 덕이 되며, 그 말을 전해 듣는 제삼자에게도 덕이 되는 말입니다. 이것이 해야 할 말이에요. 내가 입 벌려 하는 말이 나 자신에게도 덕이 되지 않고, 또 그 말을 듣는 상대방에게도 덕이 되지 않고, 그 말을 전해 듣는 제삼자에게도 덕이 되지 않는 말, 그것은 말이 아니기 때문에 하지 말아야 됩니다. ‘말이 적으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 는 말이 있습니다. 참는 버릇을 들여야 됩니다. 생각난다고 해서 다 쏟아 내면 말의 의미가, 말의 무게가 여물지 않습니다. 말의 무게가 없는 언어에는 메아리가 없습니다. 깊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간의 말이 소음으로 전락한 것도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말이 소음과 다름없이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있는 것을 늘 밖에서만 찾으려고 합니다. 침묵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침묵이 고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 안에 매일 잠재되어 있습니다. 밖으로 쳐다보려고만 해서는 안 됩니다. 안으로 들여다보는 데서 침묵을 캐낼 수 있습니다. 침묵은 자기 정화와 자기 질서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온갖 소음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키려면 침묵의 의미를 몸에 익혀야 됩니다.

 

사치한 사람은 삼 년 동안 쓸 것을 일 년에 다 써 버리고, 검소한 사람은 일 년 동안 쓸 것을 삼 년에 나누어 쓴다는 말이 있어요. 사치하면 그만큼 복이 줄어들고 검소한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복을 늘려서 쓴다는 거예요. 사치한 자는 부유해도 만족할 줄 모르고, 검소한 사람은 가난해도 여유가 있습니다. 사치한 사람은 근심과 걱정이 많고, 검소한 사람은 복이 많아요. 한마디로 사치는 악덕이고, 검소함은 미덕입니다. 속이 빈 사람이 호사스러운 옷을 입게 되면 천박해 보이고, 속이 찬 사람은 아무 옷을 걸치더라도 그 옷이 빛나 보입니다. 청정한 계행과 선정과 지혜를 몸에 익혀야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몸에 걸친 어떤 옷이라도 빛이 납니다.

 

죽음이 끝은 아닙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육체 속에 영혼이 깃든 것이 아닙니다. 이 몸 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영혼이 육체를 거느리고 있는 거에요. 영혼은 육체가 제 할 일을 다 하면 맑은 옷을 벗어 버리듯이 한쪽에 벗어 놓습니다. 죽음이란 그런 거에요. 죽음도 삶의 한 모습이기 때문에 거부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됩니다. 내가 한 평생 살면서 몸소 터득한 그 지혜를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입니다. 젊을 때 부지런히 노력하여 삶의 지혜를 모아 두지 못한 사람은 고기 없는 호숫가의 늙은 백로처럼 쓸쓸히 죽어 갈 것이고, 젊을 때 부지런히 노력하여 삶의 지혜를 모아 두지 못한 사람은 부러진 활처럼 쓰러져 누워 부질없이 지난날을 탄식할 것입니다. 사람은 성숙할수록 젊어지는 것입니다.

 

시절인연이 오면 스스로 연꽃이 피어나듯, 두루 착한 일을 하면 우리의 마음은 저절로 맑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두루 착한 일을 행할 때, 즉 선행을 할 때, 저절로 우리 마음이 열리고 맑아지는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면 그의 주변에도 맑은 기운이 점점 번져 가게 되고, 마침내는 온 세상이 다 맑아질 수 있습니다. 선행이란, 착한 일, 그것은 나누는 일입니다. 나눈다는 것은 많이 가진 것을 그저 퍼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눔이란 가진 사람이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마땅히 지불해야 할 보상 행위이고, 감사의 표현입니다. 본래 내 것이란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이 우주의 선물을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덕이 보시, 곧 나누는 일입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알면 비록 가진 것은 없더라도 부자나 다름없습니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나눔으로써 맑은 기쁨을 얻으려 하고 만족할 줄 아며, 소유는 꼭 필요한 것으로 스스로 제한하려는 그 마음들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만약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거든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넉넉함을 아는 사람은 이미 부자이고 즐거우며 편안합니다. 그런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설사 천상에 있을지라도 흡족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살이에는 지금까지 지내 왔던 것을 모두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때가 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생의 마지막까지 애착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임종 때에는 결국 자기 목숨과 함께 이 몸뚱이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어머니의 몸을 버리고 나왔고, 또 죽을 때는 이 몸을 버리고 가는 것이죠. 버리는 데서 시작해서 버리는 데서 끝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도중에라도 버릴 것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버릴 것을 버려야 새 것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단속을 하지 않는 것은 도둑에게 도둑질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속해야 할 것은 문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도 단속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단속보다 마음 단속을 잘해야 됩니다. 한 생각 불쑥 일어나는 데서 온갖 갈등과 시비가 생기고 생사의 갈림길에 놓입니다. 한 생각 불쑥 일으키게 되면 천당도 이룰 수 있고 지옥도 이룰 수 있습니다. 때문에 문단속 못지않게 마음 단속도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것은 돈이나 물건이나 집이나 승용차가 아닙니다.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 부자가 될 수 있고 가난한 사람도 될 수 있어요. 물질적인 것은 부수적인 겁니다. 우주의 선물인 재화는 넉넉한 마음을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릇이 작으면 넘칠 수 밖에 없죠. 부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고도 그걸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면 하루아침에 탕진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죠. 한 바가지밖에 안 되는 그릇에 몇 말을 담으려 하니까 감당을 못하는 겁니다. 그러니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먼저 넉넉한 마음의 그릇부터 준비해야 됩니다. 넉넉한 마음의 그릇이란 덕이에요. 덕을 쌓아야 됩니다. 누구나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많이 가지면 적게 가졌을 때의 고마움과 살뜰함이 소멸됩니다. 아쉬움과 궁핍함을 모르면 불행해집니다. 돈이나 재물이 인간이 할 일을 대신하게 되면, 그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모두들 입만 열면 경제 타령, 돈 타령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돈 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태가 각박해지면서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소멸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들이 약해지고, 무디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성에 녹이 슬어 가고 있는 것이죠. 인간성이 소멸되어 간다, 감성이 메말라진다고들 하는데, 이러한 인간성과 감성은 결국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연과의 교감이 단절되면, 감성에 녹이 슬고 인간성이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세상일에 휘말려서 우리 주위에 꽃이 핀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꽃이 핀다는 건 신비로운 일입니다. 우주가 지니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활짝 열어 보이는 거예요. 꽃을 보면서 우리 인간사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되는 겁니다. 과연 나는, 내가 지니고 있는 아름답고 맑은 모습을 얼마만큼 꽃피우고 있는가, 나는 나를 활짝 열고 있는가. 이렇게 꽃을 통해서 내 삶의 모습도 돌아볼 수 있어야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가 볼 줄 모르고 가까이하지 않아서 그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꽃 앞에서 자신의 고민도 털어놓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눌 줄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훨씬 짐이 가벼워지고 꽃한테서 많은 위로와 가르침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다섯 가지 말씀

 

 

맑은 가난을 살아라.

 

사람들은 다들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많은 것에 대한 욕망이 끊이질 않습니다. 그런데 과연 많이 가지면 행복해지는 걸까요? 이삼십년 전 우리가 어려웠던 시절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가진 것은 지금에 비해서 훨씬 적고 빈약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처럼 삭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살벌하지도 않았습니다. 연탄 몇 장으로 만족했고, 쌀 몇 바가지만 들여놓고도 행복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부족함이 없이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대체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고마워할 줄도 모릅니다. 사람이 아쉬움과 궁핍을 모르면 불행해집니다. 아쉬움과 궁핍을 알아야 갖고 있는 것이 귀한 줄 알고 고마움도 느낄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이웃과 함께 어려움을 나누던 선인들의 덕을 익혀야 합니다. 남을 도울 수 있어야 하고, 남을 도울 수 없다면 그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도우면 도움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가 다 같이 충만해 집니다. 받는 쪽보다는 주는 쪽이 더욱 충만해 집니다. 삶의 질은 결코 물질적인 부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유하더라도 나누지 못하면 불행해지고, 가난하더라도 덕을 나눌 수 있는 맑은 가난이라면, 우리는 가난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자라고 부족해도 행복이다.

 

스님들은 죽을 때 모두 손을 펴고 갑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내 것이 아니기에 가지고 있던 것도 되돌리고 가는 겁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으뜸가는 덕이 나눔의 덕입니다. 하나로 족하면 둘을 가지려 하지 마세요. 하나로 만족해야 합니다. 둘이나 셋을 갖게 되면 본래의 하나마저 잃게 됩니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합니다. 필요와 욕망의 차이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필요는 우리가 생존하기 위한 기본적인 욕구이며, 욕망은 분수 밖의 욕구, 즉 허욕입니다. 행복의 척도는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느냐에 있습니다. 행복은 배부른 상태가 아닙니다. 모든 굴레로부터 벗어나 홀가분한 상태, 이것이 해탈이며, 행복입니다. 소유하는 것은 꼭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제한하고 자제하는 것이 우리 정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소원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기도의 공덕을 한마디로 하면 마음이 활짝 열리는 데 있습니다. 겹겹으로 닫혔던 우리의 마음이 활짝 열리는 것이 기도의 공덕입니다. 백일기도 끝났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내 인생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과정에서 겹겹으로 닫혔던 마음의 빗장이 활짝 열립니다. 이것이 기도의 공덕입니다. 마음이 열리면 불안이 가시고 편안해집니다. 마음이 활짝 열리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마음이 열리면 개인의 소망이 법계의 의지에 닿아서 뜻한 바를 이루게 되는 겁니다. 기도는 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간절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에, 자신이 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고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하면서 깨어 있다면 그게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이 있는 가정은 늘 화목하고 건실합니다. 가정의 중심인 어머니가 늘 기도하고 있으면 그 가정은 늘 화목하고 건실하며 아무런 탈이 없게 됩니다. 또 기도하는 마음이 있는 직장과 사회에는 비리나 부정이 발붙일 수 없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 깨달음의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열어 누군가를 보살펴라.

 

마음을 닫지 말고 활짝 열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경제적인 결핍, 신체의 질병과 장애 때문만이 아닙니다. 물론 거기에도 요인이 있지만 경제적인 결핍과 신체적인 장애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는 현실 때문입니다. 사람이 지녀야 할 따뜻한 가슴을 우리는 잃어 가고 있습니다. 따뜻한 가슴을 지니려면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사실 마음이란 본래부터 활짝 열린 상태입니다. 우리 마음은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생각이 겹겹으로 막혀 있어서 자기 마음을 가지고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마음이 열리려면 누구에겐가 혹은 무엇에겐가 이야기를 해야 해요. 말을 걸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니면 나무나 화분의 화초에게도 말을 걸어 보세요. 그러면 저쪽에서 메아리가 있건 없건 내 마음이 열립니다. 무엇에게든 말을 걸면 겹겹이 닫혔던 마음이 한 꺼풀 한 꺼풀 열립니다. 조금씩 빗장이 풀리면서 마음이 열리는 겁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겁니다. 정신적인 사랑도, 육체적인 사랑도 아닌 그저 지켜보고 보살피는 일, 따뜻한 가슴을 나누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우리는 보살펴야 됩니다. 보살피는 행위를 통해서 가슴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조금씩 열립니다. 그 대상을 먼 데서 찾으려 하지 마세요. 멀리 찾아 나설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집 안에서, 친구 사이에서, 이웃에서 찾아봐야 합니다. 한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몇 생을 쌓은 인연으로 만난 건데, 서로 마음을 닫고 산다면 그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내가 내 삶을 보다 풍요롭게 가꾸기 위해서라도 한 생각 돌이켜서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매 순간에 소홀하지 마라.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어제도, 내일도 없습니다. 늘 오늘이고 이 순간입니다. 그러기에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사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 중 하나가 과거의 일에 연연하고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을 앞당기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과거와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면 현재의 삶이 소멸되고 맙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순간을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순간이 삶의 갈림길입니다. 한순간 잘못 생각하여 돌이킬 수 없는 허물을 지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어떻게 말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에 늘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달마 스님 어록에 보면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지 일이 모든 행위를 조절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는 일이 업을 조절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잔잔히 갖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마음을 호수에 비치듯이 마음을 조절하는 훈련을 일상적으로 해야 합니다. 선뜻 마음에 내키면 좋은 일입니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듭 강조하자면 항상 마음을 고요히 살피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법정스님의 좋은 말씀을 통해 인생의 참 의미를 되새기는 좋은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브레인 김주임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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